젠틀레인 6집 "SUNLIGHT" 라이너 노트 최고관리자 2020-03-11 129
젠틀레인을 기억하는 세상 - 6집 SUNLIGHT


인간은 관념의 동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관념의 조각들이 만들어지고, 쪼개지고, 사라진다.
어떤 단어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관념이라는 가면을 씌운다. 그렇게 인간은 조금씩 관념의 화석이 되어 간다.

관념이라는 공간에 ‘재즈’를 슬쩍 넣어보자. 누군가는 블루노트(Blue Note)라는 레이블이 새겨진 재즈음반을 언급할 것이고, 누군가는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내성적인 뮤트 트럼펫 소리를 회상할 것이다.
이는 관념이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연상작용이다. ‘모름지기 재즈란 이러해야 한다.’라는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음악의 취향이 관념으로 둔갑하는 상황이다. 

내게 젠틀레인(Gentle Rain)이란 어떤 관념일까. 클래식에 비유하면 베를린 필하모니를 역임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의 선율이 떠오른다. 그의 브람스 3번 교향곡을 접하면 한 폭의 수채화가 보인다.
화려하거나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연주를 마친 후에도 여운이 남는 음악. 그래서일까. 젠틀레인의 사운드는 흐린 물감으로 채색한 봄날의 풍경화를 쏙 빼닮았다.

젠틀레인을 록음악에 비유하면 어떨까. 영국그룹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B.J.H)가 스쳐 지나간다. 어떤 곡인지를 말해달라면 서슴없이 ‘Hymn’을 권해본다. 베를린 라이브 음반이든, 스튜디오 음반이든 상관없다.
고저장단이라는 낡은 음악공식에 집착하지 않는 단정한 곡, 그게 바로 ‘Hymn’이다. 젠틀레인의 음악은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의 노래처럼 고루하거나 경솔하지 않다. 

소개하는 젠틀레인의 6집 음반의 제목은 <Sunlight>이다. 서울에서 보기 힘들어진 청명한 하늘이 음반표지를 장식한다. 연수를 세어보니 5년만에 발표한 음반이다. 비너스 레이블에서 연작음반을 발표했던 에디 히긴스(Eddie Higgins) 트리오처럼 젠틀레인의 음악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끌림이 있다.
끌림의 정체는 ‘변함없음’이다. 6집 음반에서도 젠틀레인의 사운드는 여전하다.

또 다른 특징은 ‘노래하는 재즈’에 있다. 젠틀레인의 연주는 유재하의 노래처럼 어색함 없이 다가온다.
가사만 붙인다면 금새 따라 부를 것 같은 언어예술의 매력이 상존한다. 이런 특징이 2005년 이후 지금까지 하나의 보호색을 유지했던 젠틀레인의 정체성이 아닌가 싶다. 60개월이라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6집 음반은 젊고 산뜻한 기운이 엿보인다.

작은 변화라면 예전보다 약간 빠른 템포의 곡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리더 서덕원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그는 6집 음반에서 발라드를 자제하는 대신 밝고 경쾌한 느낌을 강조하자는 의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음반 전반에 속도감이라는 종속변수를 추가한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련한 밝음’ 또는 ‘경쾌한 흔들림’이 <Sunlight>을 설명할 수 있는 표식어가 아닐까 싶다. 

작가 J.M.쿳시는 글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작가가 이전에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매체를 변형시켰다는 느낌이 한 대목에서도 들지 않는 것, 이것이 내게는 훌륭한 글의 징표다’ 라고.
나는 젠틀 레인의 음악이 J.M.쿳시가 언급한 징표와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변형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통해서 재즈를 전달하는 방식을 젠틀레인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2011년 4월이었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봄날에 나는 마포아트센터로 향했다. 젠틀레인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공연제목은 <봄에 내리는 젠틀레인>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봄을 앞둔 지금, 마포에서 젠틀레인의 라이너 노트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삐걱거려도 계절은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계절의 변화를 확인시켜줄 소중한 음반이 나왔다.

젠틀레인을 기억하는 세상은 맑고 아름다운 기운을 잃지 않는다.
여기, 대한민국 재즈의 든든한 미래가 있다. 그들의 청정한 음악을 다시 들어보자.



                                                      2020년 2월, 상수동 서재에서
                                                      대중문화평론가 이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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